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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3] 말레꼰과 테트라포드 본문

여행/20겨울, 쿠바

[쿠바 #3] 말레꼰과 테트라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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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8/수

말레꼰 일출 - 프리투어 - 아바나 미술관 - 루프탑 - 채송화 투어 - 말레꼰

 

말레꼰(Malecon)은 스페인어(보통 남미국가)로 방파제라는 뜻이다. '보통 남미국가'라는 말을 달아 놓은 이유는 스페인에서 쓰이는 말과 남미국가들에서 쓰이는 말에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트래블러>에서 류준열님의 일출/일몰 사냥을 인상깊게 봤던 터라, 말레꼰의 일출을 담아보기로 하고 일찍 일어났다. 해는 아직 안 떴지만 점점 밝아오는 걸 느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7시면 분주해지기 시작하는 현지 골목들과는 달리 관광지의 7시는 차분했다. 말레꼰에 다다르니 일출 사냥꾼, 조거, 낚시꾼들이 몇몇 보였다. 방파제에 부딪쳐 흰 거품을 솟구치는 파도가 분위기를 한껏 자아냈다.

 

적당한 위치에 일출 사냥을 위해 마련해 온 삼각대를 설치하고 카메라는 카메라대로, 나는 나대로 아바나의 바다와 하늘, 주변 풍경들을 담았다. 아바나의 바다는 동해보다 더 푸른빛을 띄었다. 파도도 크고 묵직했다. 지평선 너머로는 바다의 색깔과 확연히 구분되는 옅푸른 하늘에 물기가 적은 흰색 유화물감으로 무심하게 붓터치한 것 같은 구름들이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구름은 (영상에서 보다시피) 바다가 하늘의 색을 반사하듯 방파제의 색을 반사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해가 뜨는 방향 조금 왼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해가 지평선 위로 올라오기 조금 전에 유난히 붉어지는 곳이 조금 오른쪽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카메라 방향을 바꿔 올라오는 해를 잡을 수 있었다.

 

<영상1> 말레꼰 일출 사냥

 

 

 

일출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노인과 바다>의 청새치를 등에 품은 태공을 봤다. 쿠바 오기 전에 완독했으면 느끼는 바가 더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침의 고요한 이미지와는 대조되게 짙푸르게 요동하는 바다를 향해 던질 낚싯대에 미끼를 끼우는 태공의 뒷모습은, 프린팅 된 청새치와 함께 깊은 인상을 주었다.

 

<사진1> 말레꼰에 부딪치는 파도와 청새치를 품은 태공

 

돌아오는 길에 EU기, 스페인 국기가 걸려 있는 오래된 건물을 봤다. 길을 건너 확인 해보니 스페인 대사관이었다. 약 400년의 세월 동안 쿠바를 식민통치한, 흑인 노예를 수입해와 사탕수수 농장, 담배 농장에서 노동력을 착취한 스페인의 대사관을 관광명소 말레꼰 앞에 떡하니 가져다 놓은 것이 의문이 들었다. 이외에도 식당이나 거리에 스페인 국기가 걸려 있거나 그려져 있거나 FC 바르셀로나 등 프리메라리가 클럽의 로고가 자랑스레 그려져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35년간 식민통치를 받아온 아픈 역사를 가진 터라 이런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사진2> 말레꼰 앞에 위치한 스페인 대사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숙소로 돌아와 씻고 아침을 먹었다. 모두가 동양인이었고 여행 와서 서로 알게된 듯한 한국인 한 그룹이 어제 있었던 일들과 오늘의 계획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난 조용히 있고 싶어서 혼자 조식 테이블에 앉았다. 잠시 후 일본인 룸메 2명이 테이블에 앉아 같이 식사를 했다. 사람 좋아보이는 한국인 여자분이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건다. "Where are you from?" 일본인들이 차례로 "Japan"이라 대답한다. 내 차례가 돼서 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의도치 않게 외국인 코스프레를 한 것 같아 잠깐 망설이다가 한국어로 내가 살았던 도시를 말했더니 여자분이 소리를 악 지르며 깜짝 놀라신다. 일본사람인 줄 알았다며. 의도치 않았지만 놀라셨다니 죄송했다. 한국인 무리들과 다음 일정이 있으신지 놀랐다는 말만 하고 총총 사라지셨다.

 

조식은 펠릭스 아저씨네보다 맛있고 깔끔했다. 구성은 오믈렛, 과일(망고 파인애플 구아바) 한두조각씩, 구아바주스, 쿠바식 커피, 두유(맛남)였다. 먹고 10시 좀 전에 나왔다. 에어비앤비 홈페이지에서 찾은 쿠바 대학생이 진행하는 프리투어는 11시 시작이었지만 그 전에 잠깐 아바나 미술관에 갔다. 

아바나 미술관은 국제관과 쿠바관이 나누어져 있는데 한 군데만 관람하면 관람료가 5CUC, 두 군데면 8CUC이었다. 많은 여행기에서 쿠바 미술관만 가는 걸 추천한다고 했는데 궁금해서 둘 다 가봤다. 국제 미술관을 먼저 갔는데 작품들이 중세 르네상스 시대 위주라 아쉬움이 남았지만 건물 내부 천장을 장식하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인상적이었다.

 

<사진3> 아바나 국제미술관 천장의 스테인드 글라스

 

 

프리워킹투어 모임 장소인 호세마르티 공원에 갔다. 에어비앤비에서 봤고 쿠바 대학생이 진행하는 프리투어라는 것만 알았지, 진행자 이름이 뭐고 투어 정식 이름이 뭔지도 몰랐지만 투어 일행으로 보이는 서너명의 사람들이 눈에 띄어 물어보니 그 팀이 맞단다.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으레 하는 '어디서 왔냐, 여행 몇일 차냐, 아바나 말고는 어디에 가봤냐' 질문들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다. 아바나대학교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Daniel은 아바나 4대 광장을 중심으로 돌며 간단히 투어스팟의 역사, 체와 카스트로의 혁명과정, 쿠바가 당면한 정치, 경제적 문제 등을 풀어줬다. Daniel이 하는 말 전부를 알아들을 순 없어서 아쉬웠지만 걸으면서 뉴욕, 몬트리올 등에서 온 여행자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12시 30분쯤 투어가 끝나고 고마운 마음에 팁을 주고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신 분들은 이 투어 프로그램을 적극 추천드린다.

 

<사진4> 아바나의 기념품 가게

 

<사진5> Daniel(파란옷)의 프리 워킹 투어

 

La luz라는 곳에서 Supreme chicken with rice먹었다. 그냥 그랬다. 기억에 남는 불친절한 곳이었는데, 화장실 들어가려니까 화장실 앞에 간이 의자와 책상을 두고 앉아 있는 할머니가 1쿡을 요구했다. 웬만하면 내려고 했는데 밥값의 4분의 1...? 마침 무시하고 그냥 들어가는 아저씨가 있어서 나도 그냥 들어갔다. 외국인 호구 관광객을 대상으로만 하는 차별적인 요금징수 같았다. 할머니가 직원한테 쪼르르 가서 쟤 돈 안내고 화장실 썼다고 뭐라하는 눈치였다. 직원이 스페인어로 뭐라 한다. 할말하않.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직원은 너무 드러나게 형편없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

 

 

<사진6> pollo(뽀요, 닭) 요리. 3.85CUC

 

아바나 시내 지도를 열심히 살펴보는 할머니, 맥주와 곁들여 요리를 먹는 중년 커플과 함께 점심을 마치고 오비스뽀 슬렁슬렁 걷다가 현지인들이 많이 모여드는 큰 쥬스가게가 보였다. 쿠바는 대부분이 외국인과 현지인에게 가격차별 정책을 쓴다. 가격표가 따로 있는 것도 웃기지만 심지어 현지인 가격표만 붙여놓고 말이다. 먼저 현지인들이 얼마를 내는지 살폈다. 2쿱이었다. 100원? 굿. 최대한 다 알고 왔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점원아저씨한테 2쿱을 내보이며 "Jugo de pina, por favor!"를 연거푸 두어번 말했다. '얜 누가봐도 외국인 여행객인데...' 조금 당황한 눈치를 보이더니 밀려드는 인파에 못이겨 2쿱을 받고 시원한 파인애플 쥬스 한잔을 내준다. 하핫. 다 알고 왔다니까~

 

 

 

<영상2> 오비스뽀 거리 카니발

 

 

흐뭇한 기분으로 아바나 미술관 쿠바관으로 향했다.

쿠바관은 국제관과는 다르게 인테리어가 현대적이었고 비교적 최근의 작품들이 많았다. 공산주의 국가라 선전물에 쓰일 법한 민중들의 단결을 그리거나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진영을 탐욕스런 괴물로 그리거나 이 괴물에 대항하는 민중들을 그린 작품들이 큰 섹션을 차지했다. 또 색채가 강한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1층에 철제 펜스로 둘러싸인 설치미술품들이 있었는데, 미국 오기 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마르셀 뒤샹의 <자전거 바퀴>를 찌끄러 뜨린 작품이 있었다. 대체 이걸 뭔 생각으로 작품이라고 내놨고 평론가들은 극찬하는지 그 뜻에 닿지 못한 나는 스스로의 무식에 대한 반발심으로 자전거 바퀴를 찌그러뜨리고 싶은 욕구가 있었는데, 여기 쿠바의 한 예술가가 나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대신해 자전거 바퀴를 찌그러 뜨려주었다.

 

 

<사진7> 아바나 미술관 쿠바관 작품들

 

 

 

미리 신청한 채송화 투어의 모임장소로 향했다. 아까의 프리워킹투어와 모임장소가 같았다. 채송화님은 쿠바 여행기를 검색하다가 가장 눈에 많이 띄는 2개의 네이버 블로그 중 하나의 운영자인데 (다른 하나는 베짱이) 쿠바가 좋아서 잠깐 눌러 앉으신 분이라는 소개와 많은 투어 참가자들의 인상적인 후기 때문에 투어를 신청하게 됐다. 투어 참가자는 총 6명이었다. 코스는 오전 투어랑 비슷했지만 한국인 특성에 맞게 중간중간 맛집도 많이 알려주셨다. 마지막 행선지인 말레꼰으로 향하기 직전 들른 광장에서 채송화 님이 저기 보이는 항구에는 가끔 크루즈선이 정박하기도 하는데 요새는 엄청 뜸해졌다고 했다. 근데 마침 요란한 고동소리가 들렸고 진귀한 풍경 보게 됐다며 흐뭇해 하셨다.

 

<사진8> 아바나에 정박하는 크루즈선

 

 

투어의 마지막은 말레꼰이었다.

테트라포드 없이 시멘트 벽에 철썩철썩 제 몸을 힘껏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키는 기운 센 파도들은, 미술관이며 거리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쿠바의 과감한 색채와 음악을 닮아있었다.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주의 진영 국가들과의 제한적인 교역환경 아래서, 그럼에도 살 길을 찾아 변혁을 꿈꾸는 쿠바의 모습이 테트라포드 없이 침식된 투박하고 거친 시멘트 벽에 거세게 부딪치는 파도들에 투영된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저녁 먹을 때 쯤 투어가 끝나고 투어 참가자 6명이서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비용여행의 컨셉에 맞진 않았지만 한번쯤은 가볼만한 고오급 루프탑 레스토랑에 가서 문어 요리, 크로켓, 카프리초를 먹었다. 2차는 Michifu라는 곳에 모히또를 마시러 갔다. 분위기도 세련되고 안락하니 좋았다. 패션후르츠와 콜라보 된 스페셜 모히토 였는데 가격이 4쿡이었다. 아바나 시내에서 보통 괜찮은 모히또는 3쿡 정도 했다. 과하지 않은 새콤달콤한 맛이었다. 유리잔을 감쌌을 때 손부터 전해져 오는 응결된 수증기의 차가움은 잔을 기울여 모히또를 처음 맞을 때 코로 들어오는 민트의 청량하고도 쌉싸름한 향기와 버무려지고, 이어 라임의 신 맛과 합이 좋은 패션 후르츠의 자극적인 맛이 풍미를 더해준다. 럼이 주는 화학작용을 받아들임으로써 즐거운 모히또의 한 모금은 마무리 된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남이 되어 살아갈 사람들이지만 알콜이 허문 이성의 무게에 가볍고 빠른 템포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서 왔는지 등을 나누며 서로 같으면 같은 점에 놀라고 다르면 다른 점에 놀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얘기를 하던 중에 일행 중 한명이 유튜브에서 인상깊게 본 한 인문학 채널 인터뷰이(쿠바에 살고 계신 한국분)의 친척동생이라는 걸 알았다. 내일 만난다길래 만나면 유튜브 잘 봤다고 꼭 좀 전해달라고 얘기했다. 3차도 있었다. 3차는 정말 안/못 갔으면 두고두고 아쉬움을 느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던 재즈바였다. 7쿡의 피냐콜라다의 맛은 특별할 건 없었지만 재즈연주에 춤을 추는 사람들, 시가를 물고 대화하는 사람들이 주는 갬성에 휩쓸리듯 취했다. 

 

새벽 3시 가까이 돼서 우린 헤어졌다.

 

<사진9> 투어 함께한 한국 분들과 1,2,3차

 

<영상3> 분위기 좋은 재즈바

 

 

 

출처

갤럭시 S9+ 기본카메라